2024. 11. 28. 17:12ㆍ문장 수집
고통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짜 행복’을 좇는 고통이다. 많은 사람이 출세, 부, 명예를 손에 잡히는 행복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런 행복은 무게 중심이 자기 안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다. 그래서 좇을수록 의심이 들고 점점 공허해지며 더 괴로워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짜 행복’을 좇는 고통이다. 진짜 행복은 허상과 같아서 찾기가 어렵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무게 중심을 자기 밖에서 자기 안으로 옮겨야 하며 자신이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기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런데 진짜 행복을 좇으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타인에게 비굴하지 않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품격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지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죽음에 의해 좌절된다. 그래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려고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얻지만, 그 결과는 완벽한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다.
마흔부터 쾌락의 양을 늘려 나가기보다는 고통을 줄여 나가는 방법이 더 현명해 보인다.
가장 낮은 단계의 욕망이 성욕이라면 가장 높은 단계의 욕망이 사유다.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이 양극단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달려 있다. 없으면 없다고 불평불만하고 많으면 많다고 지겨워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결핍은 고통이고 과잉은 무료함이다. 인간에게는 배고픔도 고통이지만 포만감 또한 불쾌다.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Stumbling on Happiness)》의 저자인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2,250명을 대상으로 언제 가장 행복한지 뇌의 상태를 촬영하여 발표했다. 그 결과 뇌가 집중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 휴식할 때 불행하게 느낀다고 발표했다.
길버트 팀의 연구 결과, 열심히 일에 집중할 때, 운동할 때,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높은 수치의 행복 호르몬이 나왔다. 반면 휴식을 취하거나 부정적인 생각, 미래에 대한 걱정, 불쾌한 경험을 기억할 때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졌다.
의욕이 너무 쉽게 충족되어 욕망의 대상이 제거되면 인간은 무서우리만큼 공허와 무료감에 빠진다. 따분함은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된다.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여 있는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정은 왕복 운동을 하는 시계추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따라서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은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것처럼 한계 효용은 반복할수록 점차 줄어든다. 따라서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도 반드시 액수에 비례하여 행복감이 증가하지 않는다.
양극단의 불행감을 무한히 왔다 갔다 반복하는 인생에서 부자든 빈자든 불행을 피할 수 없다.
“고통과 무료함은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이런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내면의 풍요와 정신의 풍요다. 풍부한 상상력, 두뇌 활동력이 뛰어난 사람은 전혀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더더더(more and more)’라는 새로운 욕망은 불충족인 경우도 있지만 이미 충족된 상태에서 기인한 권태감일 수도 있다. 휴대폰이나 자전거 또는 차량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오래 사용한 제품에 대한 싫증일 수도 있지만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욕망일 수 있다는 뜻이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랑을 원하는 것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말고 원래 갖고 있던 것의 가치를 되새겨 봐야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즉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야, 마음가짐, 태도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가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여러 충동에 내몰려 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우리에게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욕망을 충족해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이 성취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하거나 죽을 때까지 다 갖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이 끝없는 목마름과 같이 영원히 충족할 수 없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풍족하지 않으면 궁핍해서, 풍족하면 권태로워서, 끝없는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시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살아가는 데 최고의 지혜이자 원칙으로 들었다.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이렇듯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는 것이 쾌락을 찾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
환상과 같은 향락을 좇지 말고 결핍, 질병, 위험 등 현실의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야 된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덜 불행하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통을 그럭저럭 견뎌 내면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지금 고통이 없다면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셈이다
열 가지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한 가지의 고통을 피하도록 해야 된다. 소극적인 행복론의 핵심은 고통의 원인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즉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여 나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일이다. 특히 건강에 대해서 병을 예방하는 일이 쾌락을 추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타고난 성격이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것은 이미 운명이 결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고난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과 불행이 미리 결정되어 인생이 바뀔 수 없다.
그릇이 큰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은 고통을 견딜 수 있지만 그릇이 작은 사람은 작은 고통에도 불평불만을 한다.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면 갈등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선천적인 성격은 그 자체로 타고나지만 후천적인 성격은 자신의 의욕과 능력을 인식한 후에 나타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통찰할 수 없다면 타고난 기질과 본능에 지배를 받지만, 세상을 경험하면서 통찰력이 생기면 자신만의 행복의 조건을 찾을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의욕(욕망)과 능력을 일치하는 법을 배우면서 획득된 성격으로 자신의 개성을 완전하게 알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지능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써 살려는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라고 봤다. 지성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면 작동을 멈춘다. 오히려 행복은 그런 지성이 과도하게 작동하여 생겨나는 상상이나 기억을 제한해야 얻을 수 있다.
칼럼 <똑똑한 사람이 겪는 10가지 증상>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지적되듯, 더 잘 아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똑똑할수록 자신감이 낮아진다. 고지능자들은 다각도로 문제를 분석하기 때문에 부정 편향의 성향이 나타나 긍정적인 사실보다도 부정적인 사실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또한 대체로 지능이 높을수록 사회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인간관계에서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해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고독을 선호하여 친구를 사귀지 않고 비연애, 비혼을 택하는 등 인간관계를 최소화하여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인간 가운데는 천재가 가장 고통을 많이 겪는다. 두뇌가 뛰어난 천재일수록 불행이 더할 수 있다. 정신적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신경 기능이 무척 활발하여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변화나 기복이 크기 때문에 불쾌감이 더 강할 수 있어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최근의 주장은 지능이 높을수록, 천재일수록 민감성과 감수성이 높아서 더 불행할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이론을 뒷받침한다.
지성과 이성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이 원래 비이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행복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성이 잘못된 환상을 많이 만들어 낸다. 인간은 쾌락을 바탕으로 행복이라는 큰 건물을 짓는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즐거움과 쾌락의 원천인 환영이다. 인간이 방대한 지식을 늘린다고 해도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예견으로 불행감을 더할 뿐이다
《성경 구약》 전도서 제1장 18절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잘 대변한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고뇌의 더 큰 원인이 되듯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상상력, 회상과 예상이라는 지성 활동에서 비롯된다. 많이 알수록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은 쓸모가 없다. 행복은 지식에 비례하지 않는다. 인생살이에 무지한 젊은 사람이 역설적으로 인생의 많은 경험으로 욕망의 탐욕과 충족의 덧없음을 깨달은 늙은 사람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다.
인간이 지성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두뇌가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성과 정신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정신은 ‘뇌’라는 신체 기관 일부분이 활성화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돌아보지 말고 내다보지 마라
돌아보지 말고 내다보지 마라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대한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지나친 상상력과 추측, 기억은 불행의 씨앗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행복을 미래에 두지 말고, 과거의 고통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무엇보다 공중누각을 쌓아서는 안 된다. 쌓아 올리자마자 한숨을 쉬면서 다시 허물어뜨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을 눈앞에 떠올리며 미리 불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쾌락과 고통을 바탕으로 행복과 불행이라는 커다란 환상의 건물을 지었다. 인간에게는 고통의 양이 쾌락의 양보다 훨씬 늘어나고, 인간은 실제로 죽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의 양이 특별히 더 증가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극심한 감정 변화, 격정, 동요를 겪어 그 흔적의 지속적인 특징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괜한 상상으로 예전에 자신이 당한 불의, 손해, 손실, 명예 훼손, 냉대, 모욕 등을 다시 생생히 떠올리거나 마음속에 그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불쾌한 일은 오히려 될 수 있는 한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담담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좋다. 분노는 제어해야 한다. 그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부와 권력이 있다 해도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힘들어하며 죽음 이후 고통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신을 믿고 종교를 믿는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는 종교를 통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기체의 전체는 끊임없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장은 확장과 수축을 통해 끊임없이 혈액 순환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경우 건강의 균형이 깨져 내적 안정감을 해칠 수 있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명랑한 기분과 긍정적인 생각에 돈이 분명 도움을 주겠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삶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건강은 필수다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을 다른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어리석다. 승진, 명예, 공부 등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과로할 이유가 없다. 건강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도 있는 것이다.
명랑하고 쾌활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즐거워진다. 낙천적인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 일만 이루더라도 기뻐하지만 우울한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아홉 가지 일을 이루더라도 기뻐하지 않는다. 실패한 한 가지 일에 크게 상심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명랑한 사람은 불행한 일을 겪어도 쉽게 화를 내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기질과 매우 관련이 있다. 그러나 꾸준한 운동이라는 노력으로 명랑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심장과 혈관, 근육을 튼튼하게 하면 우울한 기질의 사람도 어느 정도 쾌활하게 살 수 있다.
건강 다음으로 우리 행복에 중요한 요소는 마음의 평정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익시온이 돌아가는 바퀴에 묶여 있는 것에 비유한다.
40대는 사회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로 많은 사람과 접촉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긴다. 시기심, 질투도 겪는다. 자신도 직업과 관련된 공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동호회나 동창회 등 사적인 모임에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실언이 많이 오고 간다. 예를 들어 돈 자랑, 자식 자랑, 집 자랑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흔들림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듯이 외적인 자극의 비중을 줄여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라.
둘째, 질투를 경계하라.
셋째, 큰 희망을 걸지 마라.
넷째, 세상에는 거짓이 많다는 점을 알아라.
행복은 학교에서 지식처럼 배울 수 없고 종교 단체에서 경건하게 체험할 수 없다.
평정심을 추구한 대표적인 학파가 스토아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우주 자연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일어나게끔 이미 결정돼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불행으로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우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어 가는 것, 죽어야 하는 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슬픈 일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슬퍼하지 않게 된다.
세상의 많은 일이 우연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불안이나 걱정이 줄어들게 된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소망과 욕구의 접촉 범위가 커지면서 불행을 자초하는 기회와 환경이 커진다.
마음의 평온이 행복이라면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자극도 줄여야 되지만 비교하는 감정, 시기심, 질투, 지나친 기대와 희망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음악은 아주 위대하고 대단히 근사한 예술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예술에서 찾는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을 좋아해서 음악의 형이상적 가치를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서 분석하기도 했을 만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예술의 미적 관조와 음악에 있다고 봤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작품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고뇌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낀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의 역할은 단순히 삶의 고통을 순간적으로 위로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자 세계의 근원인 의지를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깊이 빠져들어 마음 전체를 채우는 상태를 말한다. 삶에 대한 의지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의지와 고통이 없이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
여러 분야 가운데 의지의 고통을 초월하게 하는 예술의 힘이 가장 뚜렷한 것은 음악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많은 작품이나 예술은 모방을 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음악은 그런 모방 없이 직접 인간의 심금을 울린다. 음악은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없이 아름다운 감동을 직접 전한다. 심지어 우리가 가사를 모르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많다. 이것이 멜로디의 매력이다.
특히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웅장한 오페라는 독일어 가사를 전혀 몰라도 큰 감동을 준다. 이렇듯 음악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 참을 수 없다면 클래식을 들을 것을 권장한다. 오페라는 가사를 이해해야만 되지만 실내악이나 관현악은 그럴 필요가 없다. 클래식은 이 세계가 의지라는 사실을 직접 느끼게 해 주는 통로와 같다. 이 세계가 의지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예술이다.
정신적으로 고상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여가 시간에 이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해 무료함에서 빠져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곧 현실에서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사람을 속물로 칭한다.
고독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벗이다. 마흔부터 어느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는 잔잔함을 스스로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는 발전한 인공 지능에 생각하는 것까지 맡기고 있다.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정보를 요약해 주고, 해결책도 알려 주는 장점이 반대로 우리의 독자적인 사고력을 잃게 만든다.
첫째,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한다.
둘째, 두 번을 읽을 것을 권한다.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것이 좋다. 그래야 사물의 맥락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끝을 알고 있으면 처음 부분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악서를 피하라. 쇼펜하우어가 지칭하는 악서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쓴 책이다. 많은 사람이 글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한다. 대중은 어리석게도 그런 글을 읽는다. 사물 자체에 대한 생각을 다룬 극소수의 책을 읽어야 한다. 직접 사물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의 작품이 영원한 생명과 불멸의 명성을 갖는다.
천재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고 “사물의 전체와 위대함, 본질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자기 업적의 주제로 사는 자”다.
사람은 자신의 취향대로 상대방을 골라서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집안의 대를 이은 것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의 주장대로라면 상대방에게 프러포즈를 해서 차이는 경우는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그 집안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상처가 된다. 실연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그 집안의 생명이 끊기느냐 이어지느냐의 중대한 일인 것이다. 그 바탕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하려는 삶에의 의지가 있다.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 교육 문제, 경력 단절 등이 있지만, 나의 삶을 연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체념과 우리 자식에게 미래가 없다는 우려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의 마지막도 몇 명 남지 않은 친구가 함께했으며 오랜 병간호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와 누이가 불평 없이 도맡았다. 니체가 이미 정신을 잃을 상태여서 전혀 몰랐지만 힘들 때 도와주는 것은 가족뿐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환상에 속아 결혼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그런 환상을 미리 알고 혼자 사는 사람은 행복할까? 어차피 둘 다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충분하다.
“결혼은 자신의 권리는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다.”
구석기 시대라면 몰랐던 현실들을 인터넷이나 TV를 통해서 알게 됐다. 이 세상에 멋진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혼의 현실뿐만 아니라 실패 사례를 보면서 상대방에 대한 조건이 너무 높아지고 있다. 자연은 인간이 눈먼 사랑을 하기를 원하는데, 인간은 너무나 따지려고 든다.
“조건을 고려해서 이성적으로 선택한 결혼에는 본능에 이끌린 사랑 같은 정열이 없다.” 그러나 “성적인 매력에만 이끌려서 결혼하면 평생 후회와 탄식을 안겨 줄 반려자를 얻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비유처럼 사회를 이루는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시’를 세운다.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즉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 시기심, 자존심 등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아픔을 주는 일이 많아진다. 가족, 연인 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다 보면 아픔을 주는 막말을 하게 된다. 부모는 자식이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성취하기를 바란다. 남편과 부인은 서로 결혼한 사이라고 해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이도 말 한마디 실수로 만남이 깨지는 일이 생긴다.
상대방이 나와 다르거나 잘못된 생각을 갖더라도 그 인격을 존경해야 상처를 주는 가시 돋친 말을 피할 수 있다. 서로 세상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서로를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집어넣고 화상을 입고는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한다.”
마음이 춥다고 느껴 타인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내면의 공허, 의식의 빈약, 정신의 빈곤’ 때문에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한다. 유유상종하며 여흥과 오락을 추구하는데, 처음에는 관능적 향락과 각종 즐거움을 맛보려고 하다가 결국 방탕한 생활을 좇게 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의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며 불합리한 사람들과 접촉하면 여러 가지 위험과 해로운 일에 노출될 수 있다. 굳이 그런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다.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홀로서기’와 타인과 ‘함께하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되고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의 조건을 ‘자족(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고독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고독과 사교성을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지적인 능력이 클수록 혼자 지내려는 경향이 강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질수록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은 위대한 사람의 특성이다.
고독은 인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친구든 애인이든 가족이든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각자 개성과 취향, 의견이 달라서 늘 불협화음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자기 자신과는 유일하게 완전한 융화가 이뤄질 수 있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오직 자신의 고독 안에 생겨난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 원천인 고독을 피하지 말고 그것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된다.
인간은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 결국 그런 솔직함이 나중에 뒷담화와 비방의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정과 사랑, 결혼으로 이어지는 밀접한 인간관계도 비밀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런 면을 봐서는 다른 사람과 교제가 적을수록 좋다. 잡담, 유흥, 즐거움 뒤에는 가식적인 모습이 있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고독을 견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독한 시간을 생산적으로 잘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내면의 공허, 권태감 때문이다. 이럴 때 남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의 고독을 혼자 대면하기 두려워 비겁하게 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단조로움을 피해 외부로부터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르다 보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 생긴다. 남과 함께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무능력, 내면의 결핍과 공허감 등이 있다. 이것이 계속되어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원하다 보면 유흥에 빠지거나 술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은 홀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결국 되돌아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다. 다른 사람과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줄이면 자신만의 자유와 욕구가 회복된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을 때 어른으로 더욱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젖을 떼면서 ‘공포’에서 독립하게 되듯이 고독은 각자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고독은 인간의 본성에 맞는 본래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 준다.
인간의 군집 본능은 자신의 고독에서 느끼는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단지 심심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예시처럼 금관악기로 협연을 하지 못하는 연주가와 비슷하다. 훌륭한 거장은 충분히 독주를 할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혼자의 힘으로 잘 살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다수의 의견에 맞춰 희생하거나 눈치볼 일이 생겨나고 마음을 툭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난다. 점점 진실한 관계를 맺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해 생각과 지혜 등을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어야 하는 존재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잡아 먹어야 되며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불운의 사고에 희생당한 사람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지는 모순적인 존재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많은 경우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늘 결핍은 인간에게 고통이지만 충족에서 과잉으로 넘어가면 권태, 지루함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 사이의 짧은 만족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행복을 즐기는 순간은 찰나와 같이 금방 지나간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행복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작은 행복감에 만족할 수 있어야 된다. 행복은 멀고 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까운 곳에 있다.
영원한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쾌락은 단순히 결핍을 제거하고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으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성공, 성취, 합격 등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면 너무나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그 기쁨이 몇 달씩 지속되지는 않는다.
행복은 빨리 잊혀진다. 또 다른 결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을 겪을지 알 수 없으며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너무 큰 행복을 기대해선 안 된다.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감각이 무딘 동물이 현재에만 몰입하기 때문에 행복한 반면, 상상력으로 만든 미래의 환영에 갇혀 사는 인간은 불행하다.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희망은 행복의 바탕인 마음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만 충실해야 한다.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으로 급히 쫓아가는 반면에 현재는 거들떠보지도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고 확실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은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현재를 의미로 채울 필요가 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현재 그 자체를 기분 좋게 받아들여 즐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이 내일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그것은 착각이다. 인생 전체를 구성하는 하루하루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늘 새로운 것이다. 현재의 가치를 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된다. 과거와 미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매 순간의 가치를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하루하루는 하나하나의 인생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현재만을 살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데 마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만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만약 노(No)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마지막 인생으로 생각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명언과 닿아 있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마흔부터는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살아야 된다. 남의 기대와 욕망에 맞춰 살아선 안 된다. ‘삶을 위한 삶’이라는 생존을 위해 자아 실현이라는 가장 높은 욕구가 잊혀지면 안 된다. 겉보기에 사람들은 같은 지향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곳을 보고 싶어 한다. 동일화되고 표준화된 대중 문화의 영향력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 행복은 기만이다.
자신이 원하는 한 가지만 찾아보라. 원하는 바가 없는 인생은 타인에게 휘둘린다.
재산이나 부의 가치와 비교해 더 가치 있는 것은 지적인 교양이다. 돈을 채워도 정신이 텅 비어 있으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은 소유하는 사람보다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에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진짜 부자와 가짜 부자의 차이는 분명하다. 진짜 부자는 부를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는 데 최대한 활용한다. 경제적, 시간적 자유를 얻으면 유흥이나 과시, 소비보다 자신의 교양을 쌓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독서, 음악 감상, 여행 등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고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가짜 부자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지 못하고 남에게 과시하거나, 낭비와 방탕으로 돈을 쓴다.
가난했던 사람은 빈곤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어쩌다가 우연히 굴러들어온 부를 향락과 낭비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다시 가난해지면 예전처럼 재산 없이 그럭저럭 살 수 있다. 결국 돈이라는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살아간다. 부자는 재산을 유지하려고 한다. 타고난 재산을 가진 사람은 고된 일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창조적인 재능에 따라 살 수 있다.
남에게 너무 잘 보이려고 의식하다 보면 눈치를 보게 되고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본래 자신의 모습보다 더 좋게 평가받으려는 허영심이 커지게 된다. 우리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타인의 의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변덕스러운 기분에 좌우되는지를 알게 되면 타인의 평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도 남을 평가할 수 없고 남도 나를 평가할 수 없다
나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는 타인의 마음은 피상적이며, 천박하고, 왜곡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타인은 정작 나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을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제삼자의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다. 특히 칭찬이 아니라 비난인 경우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보면 무식하고, 편견이 있고 좁고 빈약한 경우도 있다. 그런 평가는 아예 무시하는 것이 더 낫다.
명예나 출세를 중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걱정에 살고 있다. 자신이 지닌 참된 모습보다는 남의 마음속에 깃든 자신의 모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면 불필요한 불안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많은 고뇌와 번민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잘못된 태도에서 유래한다. 그 바탕에는 질투, 증오심, 허영심, 자존심 등이 있다. 즉 남과 비교하여 더 좋게 평가받고 싶으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증오하게 된다. 또한 실재의 자신보다 더 좋게 평가받고 싶은 허영심은 무시받지 않으려는 자존심을 나타낸다. 이 가운데 불행감을 가져오는 허영심을 없애는 일이 가장 어렵다.
호감 가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
가장 어리석은 일이 명성과 명예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명예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격언은 타인의 견해를 자신의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망상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더 많은 존경과 지지를 받아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해서 관직, 훈장, 칭호를 얻는 일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에 기대하는 망상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오히려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속아 자신의 건강이나 목숨을 바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바탕에는 탐욕과 집착이 자리잡고 있다. 결국 그런 노력이 아무런 실속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명예욕, 허영심과 구분되는 자긍심의 중요성을 말한다. 허영심이 본래 모습보다 더 좋게 타인으로부터 갈채를 받으려는 욕심이라면, 자긍심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장점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다.
흔들리지 않는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는 타인의 호감을 얻으려는 허영심을 없애야 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허영심이 들면 말을 많이 하고 자긍심이 들면 과묵해진다.”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생기는 순간 인생이 달라진다.
행복의 참된 조건은 객관적인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주관적인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개인의 행복은 지위나 재산과 같은 ‘외적인 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받아들여 의미를 구성하는 의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느냐, 비관적으로 보느냐는 그 사람의 관점, 정신력에 비례하는 것이다.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통해 이런 관점을 풍성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하게 품격을 쌓고 교양 있게 나이가 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서와 사색, 그리고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통찰이 필요하다.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을 경험한다고 저절로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100년을 산다고 모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이는 ‘무상’하다고 한탄하지만 어떤 이는 ‘소풍’처럼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도 있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이 그 삶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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