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논어를 읽어야할 시간, 신정근

2024. 11. 29. 15:47문장 수집

공 선생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많이 아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참으로 아는 게 없다. 못난 사람이 검은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뭔가를 물어본다면 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해진다. 하지만 나는 물음이 갈 수 있는 두 갈래를 하나하나 캐물어서 의문을 다 풀어줄 뿐이다.”

군자는 문맥에 따라 군주와 같은 통치자 또는 자기 주도적인 사람을 가리킨다(4강 ‘불우불구’ 참조). 한정된 세계에 관심을 두기보다 전체 입장에서 위험을 관리하며 세계 전체에 책임을 지는 지도자나 리더를 가리킨다.

군자불기는 된사람의 뜻으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남들에게 대접받을 만한 자리를 골라간다는 말이 아니다

군자불기는 군자가 특별한 모양, 일정한 용도로 정해져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그릇이 아니라는 뜻이다. 군자는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 스페셜리스트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스페셜리스트가 지도자가 된다면 새로운 역할을 위해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안목을 보완해야 한다.

제너럴리스트 중 어느 쪽이 중요한지 논란이 많다. 제너럴리스트를 중시하는 쪽은 사람이 늘 말단에 있지 않으므로 여러 부서를 돌면서 회사의 전반적인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스페셜리스트를 중시하는 쪽은 아무리 일반적인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특정 분야를 책임지고 처리하는 전문적 식견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하나가 모든 직종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사람이기에 말과 실행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벌어지지만 그 사이를 오므리기 위해서 사람은 시지프스 신화처럼 계속 돌을 굴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말을 줄이고 약속을 신중하게 할 필요가 생긴다. 말은 하기도 쉽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지만 실행은 어렵고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결국 말이 원래 실행을 따라갈 수 없거나 말이 실행을 앞설 수 없으므로 둘 사이를 좁히려면 말을 적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은 굼뜨게, 실행은 재빠르게!”

공자의 말을 다시 보라. 자기주도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배울 것을 찾는다. 모든 곳이 자신을 일깨우는 교육 현장이자 자신을 가다듬는 도량이다

지도자나 책임자의 미덕은 설령 자신이 조금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몫을 보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앞서서 몫을 챙기려고 하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사람들이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을 보이게 된다.

반면 알고 싶은 마음이 말마다 나타나면서 묻는 사람이 있다. 물으면서 하나씩 터득하며 새로운 것을 묻는 사람도 있다. 물으면서 상대가 알고 싶은 것까지 묻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 질문과 대답은 가르침을 주고받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가르치는 수평적인 관계가 된다.

넓이와 깊이 둘 다를 갖출 때 온전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젊어서는 욕망을 따라가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의미에 관심을 두게 된다. 관심關心이란 마음의 빗장을 열고 닫는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마음의 문 안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던 것이 마음 한켠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건성이 아니라 간절하게 물으면 대화를 이 세상에서 가장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 아울러 그렇게 알게 되면 그 앎은 영혼의 피와 살이 되어 ‘망각’으로 잃지 않는 생생한 앎이 된다. 당신은 지식을 시험 문제의 풀이로 알고 잊어버리는가 아니면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으로 받아들여 자신과 일체를 이루는가? ‘절문근사’는 사람 사이를 아름답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뭔가 먹고 싶을 때 찾아서 먹으면 된다. 하지만 의미는 그렇지 않다. 의미를 알고 싶고 찾고 싶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 의미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지 않는다. 의미의 느낌표를 자주 찍으려면 평소 물음을 많이 하고 대답하는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다.

평소 아무리 잘 지내던 사람들도 고통과 과실이 공평하지 않으면 친했던 것만큼 더 격렬하게 다투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원래 동료 사이였던지 믿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