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오승주

2024. 11. 28. 08:49문장 수집

아이가 어릴 때는 아버지가 잘못해도 가만히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 더 자라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면, 아이는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서 무섭게 심판합니다. 아이에게 심판당하지 않는 아버지가 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냈던 부모에게 아이는 두 번째로 찾아온 기회입니다. 조금은 낯설지만 아이를 사랑하고 애착관계를 형성하려고 애를 쓰면 그 아이는 훌륭한 부모가 될 것이고, 아이는 더욱 안정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이와 같은 진전은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는 ‘다른 생각’에 매우 취약합니다. 다른 생각은 대화를 통해서 조정해야 하는데, 물리적인 진압이나 제거를 통해서 해결하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불만을 제기하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계기가 생깁니다. 하지만 대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른들은 아이를 억누르려고 하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의 소통은 요원해집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부모 역시 아이를 편안하게 하되 개입을 최소화합니다. 못난 부모는 아이가 늘 눈치를 보게 만듭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어른은 아이 못지 않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실제로 부모들이 아이와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거리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담은 허물지 말라’는 서양의 격언을 생각해보세요.

아이에게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을 때, 자신의 행동 결과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알아야 할 대부분을 배울 뿐만 아니라 자기 절제력까지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체벌하면 아이들은 교묘히 부모를 속이려고 합니다. 체벌로 억울한 피해를 보는 아이의 마음속에는 원망이 싹틉니다. 체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부모는 위험합니다.

아이들은 나쁜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놀이에 집중하지만, 부모에게 억울하게 받은 체벌의 상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 마음속에 남은 앙금은 잡초처럼 뿌리를 내리고 자라납니다. 무분별하고 불공정한 체벌을 남용하는 부모가 보기에 아이들은 얼핏 온순하고 착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들이 애써 삭힌 것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 마음속은 어떻겠습니까? 억울함과 원망, 의심, 분노 등이 가득할 것입니다.

“다 자라지도 못한 아이들을 일터로 보내 한 푼이라도 더 우려내려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이 미래에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을 날려버리는 셈이며,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미래에 향유해야 할 건강, 안락, 좋은 품행 등도 모두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 『로버트 오언』

오언은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복합물은 신의 위대한 지도력이 이루어놓은 모든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다양한 여러 모습을 띠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신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맞춤형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죠. 저는 이 방법을 두 아이에게 실천하려고 애씁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이 획일적으로 길들여지고 있어서 개인의 정신은 메말라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어른이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야말로 자질의 발견과 승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잘 몰라요.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어떤 점에 소질이 있는지. 어른들 역시 아이를 자세히 관찰해야만 미래에 어떤 일을 하면 좋겠다는 예견이 생깁니다. 부모의 깊은 관심과 오랜 관찰을 통해 아이 진로의 방향을 잡고, 그 길로 성실하게 나아가는 일은 매우 소중하지만 그만큼 어렵습니다.

맑은 밤하늘의 별무더기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는 이미 초롱초롱 빛나는 별입니다. 토끼풀, 코스모스, 들꽃 한가운데 숨죽이고 꿀벌, 나비가 노는 걸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이미 한 송이 꽃입니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땅입니다. 이 기억을 되찾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로버트 오언』에 나온 말처럼 “책 따위로 아이들을 성가시게 할 것이 아니라, 주변의 흔한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것들에 대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그 다음엔 그들에게 친숙한 대화로 그것들의 쓰임새와 성질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게 진짜 공부입니다.

웹 에이전시 회사를 운영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업이란 게 어떤 건지도 몰랐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기에 사업이 잘 될 리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인생 수업료’를 내야 했고, 집안에서의 발언권도 약해졌고, 지금도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실패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죠. 합리적인 득실과 가능성을 계산하는 대신 망상적인 낙관주의에 기초해서 중요한 결정을 해버렸으니까요.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라고 부르더군요. 밑도 끝도 없는 낙관성에 기인했다고 해서 ‘낙관성 편향(optimistic bias)’이라고도 부르고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투의 사고방식도 여기에 들어가죠. 아이들은 편향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편향으로 대하면 소통이 안 됩니다. 아이들의 요구와 반응, 돌발 상황에 무척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자세히 관찰하면 빈틈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생각하고 관찰하고 대화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고 하나의 익숙한 매뉴얼 같아서 슬퍼지더군요.

중요한 건 편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아이들의 의견이 익어갈 때 부모도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싸움이 끝나도 앙금은 오래 남으니까요. 아이가 스스로의 의견 속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좋은 결론을 찾으려면 부모의 입장이 너무 강하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은 아이가 옳게 되니까요.

저는 “저도 과자 주세요”와 “저는 왜 과자 안 주세요?”의 차이가 뭔지 몰랐어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나서부터는 긍정적인 표현방식과 부정적인 표현방식을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쁨은 인간의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슬픔은 인간의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에티카』)이니까요. 과자를 달라고 하는 건 과자를 먹는 기쁨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과자를 왜 안 주느냐고 묻는 것은 당장 과자를 못 받은 슬픔이 핵심입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전혀 다른 해석이 될 수밖에 없고, 마음도 해석 방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부정적인 표현을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꾸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지각하지 마라”를 “오늘 밤은 30분만 일찍 자고,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꺼내놓고, 아침에 뭘 먹을지 지금 정하자”로 바꾸는 거죠. 잠자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저녁에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말로 부정하기는 쉬워도 행동으로 긍정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선물한 ‘행동의 긍정’은 아이 몸에 평생 새겨집니다

아이가 슬퍼하면 저는 대화합니다. 슬퍼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듣지만 슬픔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말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제가 놓친 것을 생각합니다. 이때 저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재판장이 아니라 기자처럼 행동하는 게 아이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슬픔에 빠뜨린 사람을 혼낸다고 하더라도 아이의 슬픔은 큰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복수’가 아니라 ‘이해’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슬퍼하는 아이와 슬픔에 빠뜨린 아이가 명백한 경우에도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슬퍼하는 아이 역시 이 일에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어린 시절의 마음을 ‘평형 상태’라고 표현했는데, 연못의 물처럼 바람이나 벌레의 움직임 같은 조그만 자극에도 동요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남이 웃으면 같이 웃고, 남이 울면 같이 울고, 남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이 앞에서 슬픈 생각을 하거나 어두운 표정을 하면 아이에게 그대로 전염됩니다.

아이가 형편없는 성적표를 가져오면 혼을 내는 부모들은 다음에도 썩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을 확률이 큽니다. 학교 공부와 성적, 성실함, 규칙적인 학습 습관 등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시험을 못 본 일에 집중해서 혼을 내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종종 문제의 핵심을 놓치면서 아이만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는 매일 성숙합니다. 성숙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관념일 뿐이죠. 난초처럼 물을 주고 말을 걸어주고 만져주세요. “건강한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게 양육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왕자』의 언어는 어렵지 않아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면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 안에 수많은 은유와 상징, 아포리즘이 담겨 있어서 읽는 사람의 읽은 횟수와 나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매주 같은 시간이 되면 성심성의껏 답변을 해주지만 때로는 짜증이 날 때도 있죠. 알 만한 애가 자꾸 슬픈 얼굴로 물어보니까요. 그러고 나서 “엄마 다른 일 하면 안 돼요?”라고 묻습니다. 말문이 막힙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아이들의 질문이란 꼭 대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의 의미를 살펴봐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는 두 개의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우리 가족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니까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는 말을 생각한다면 아이의 질문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아이가 뱉은 질문을 조목조목 살펴보면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언론 자유는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하지 못하게 일부러 억압하는 부모는 없지만 아이들이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을 제거해야 합니다. 항상 잊지 않고 말할 기회를 주고 아이의 말을 제대로 번역해서 다른 가족에게도 들려주는 게 중요합니다.

어른이 아이의 암흑을 외면하거나 회피할수록 아이는 ‘암흑의 핵심’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암흑의 핵심』에서 혐오와 두려움의 공간인 아프리카보다 더 어두운 백인들의 행태를 고발한 것처럼.

아이들은 일상적으로 배신, 질투, 욕심, 싸움 등 다양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른의 세계보다 다양한 권력관계가 아이들 사이에 ‘실재’합니다. 아이와 용감하게 어둠을 헤쳐 탐험한다면 아프리카가 말로에게 진실을 보여줬듯, 아이도 가족에게 진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괴테의 권위를 빌려서라도 아이들의 사랑 문제에 좀 더 진지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감정 중에서도 최고의 감정이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주제입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유년 시절은 감수성 그 자체”라고 말했죠. 아이들의 감정과 감수성, 그리고 사랑은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그것에 이성적으로 개입할수록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왜곡된 사랑관과 감정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문 고전이 당대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지성인의 해법을 담았다면, 문학 고전은 ‘문제’를 담았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문학가는 문제를 드러내줄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했죠.

Q : 이성 친구를 처음 사귄 아이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A :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왔네요. 아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니까요. 가슴 떨리던 첫 만남에서부터 위태로운 순간들을 견뎌낸 시간에 이르기까지 아이 가슴에 단비처럼 이야기가 내리겠죠. “나의 상상력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모습”이라고 고백한 베르테르의 마음을 아이에게 고백해보세요.

아이에게 뽀르뚜가 아저씨처럼 대하고 있나요, 제제의 아빠처럼 대하고 있나요? 두 인물을 비교하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움이 됩니다. 뽀르뚜가 아저씨는 제제의 친구로서 제제를 존중하고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반면, 아빠는 제제를 철없고 심술궂은 장난꾸러기로 볼 뿐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현재’를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실직 상태에 빠진 아빠는 자기 기분에 휩싸여 제제는 안중에 없었고, 열등감에 빠져 제제가 자신을 위로하려던 의도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해 매를 듭니다. 공장장으로 취직했을 때 제제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죠. 저는 제제 아빠의 위선적인 모습에 치를 떨었습니다. 제제가 “저 사람은 아빠가 아냐”라고 했을 때 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반면 뽀르뚜가 아저씨는 어떤 기분이든 현재에 집중하고 제제와 함께 현재를 즐깁니다. 바로 그것이 ‘어린이의 시간’입니다

창문과 커튼을 닫았다고 아이가 비가 오는 걸 모를까요? 하지만 일부러 비를 구경하라고 밖으로 떠밀 필요는 없지요. 비 오는 풍경을 구경하며 비의 원리를 이야기하듯, 돈을 벌고 쓰는 경제활동에 대해서 자유롭게 대화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여인들과 아이들과 하인들과 약한 이들과 궁핍한 사람들과 무지한 이들의 잘못은 곧, 남편들과 아버지들과 상전들과 강자들과 부자들과 유식한 이들의 잘못이다.” - 『레 미제라블』

아이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나 아이의 말과 행동이 옳지 않았을 때, 이성적으로만 판단하고 제재를 하는 부모님들을 볼 때,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아이와 옳고 그름만 따질게 아니라 아이의 감정도 한 번쯤은 고려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아이가 보이는 나쁜 행동의 근원이 무엇인지 찬찬히 되돌아본다면 함부로 혼내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아픈 아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반응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건강한 아이에게도 그에 합당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의 행동을 무마하거나 진압하려는 것은, 아이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화가 난 것을 보상받으려고 아이에게 화를 내는 것인지, 아이의 심술궂은 행동을 줄이고 진심으로 대화를 하려는 것인지 목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과를 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몸소 가르쳐주면 아이 역시 잘못했을 때 사과를 곧잘 합니다.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서로 다투기나 하고 쉽게 짜증내고 상처 준다고요? 그것이 떨어져 지내는 처지에 비하겠습니까?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소중히 받아들일 거예요. 설령 진짜 시간이 없더라도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 어느새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돈만 쥐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소비 방식’까지 가르쳐줘야 합니다.

『중용』이라는 책에는 “갈 때는 후하게 주고 올 때는 적게 받으라”는 ‘후왕박래厚往薄來’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조그마한 계산에 집착하지 말라는 동양의 오래된 지혜죠. 큰 선물을 쌓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하루에 하나씩만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건 어떨까요? 칭찬 선물, 그림책 읽어주기 선물, 좋아하는 반찬 만들어주기 선물, 화가 날 때 한 번 참기 선물. 마르셀 모스도 선善과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말라고 했어요. 그것은 “부과된 평화 속에, 공공을 위한 노동과 개인을 위한 노동이 교대로 일어나는 리듬 속에, 또한 축적된 다음 재분배되는 부 속에 그리고 교육이 가르치는 서로 간의 존경과 서로 주고받는 후함 속에”(『증여론』) 있다고 가르쳤죠.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선물을 맘껏 줌으로써 가족 스스로를 따뜻하게 만들고 서로의 영혼을 살찌워야 합니다.

백전불태百戰不殆를 백전백승百戰百勝 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부모가 많기 때문에 아이와 다투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생겨납니다. 백전불태는 ‘생존의 정신’입니다. 생존해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생존이 더 중요합니다. 가족으로 비유하자면 ‘관계의 생존’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대결에서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승패에 집착하다 보면 아이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선을 제압해야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위태롭지 않은 관계’를 목표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아이의 작전을 초기에 진압하지 않는 까닭은 아이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아이의 돌발 행동 역시 아이에 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으니까요

손자의 ‘허실虛實’만 잘 알아도 아이 키우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크게 혼낼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 후에 의외로 따뜻하게 말해주고 선물도 주면 아이는 당황하면서도 반항하려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제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패턴을 읽히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잘못을 했을 때는 반드시 잔소리를 하거나 혼낸다는 걸 아이가 알고 있다면 그 행동은 피합니다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려 하지 말고 최대한 부드럽게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흥분하면 지는 거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몇 마디 주의를 주었는데 강하게 반항하면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차분히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그러고 나서 한명씩 따로 상대합니다.

존댓말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도 반말이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부족한 것을 채우면서 완전해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의 생각이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아이의 입장에서는 타당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것이 아이와의 갈등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팡세』의 이 구절을 읽고 오랫동안 아이와의 관계에 응용하면서 많은 갈등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순간에도 부모는 아이의 옳은 의도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게 대화의 열쇠니까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비디오’라는 식으로 여기지 말고 아이와 차근차근 검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판단의 과정이 숨어 있다면 아이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이 점을 매우 힘들어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정에서 배워야 하는 민주주의지만 부모 역시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기에 매우 낯설고 힘들죠. 부모는 차분히 상황을 살펴보고 여러 가지 예상되는 결과를 마음속으로 정리해두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아이가 경험한 것만이 진정한 근거이며 아이도 쉽게 반항할 수 없죠. 아이의 의견을 거절하는 것은 무척 논리적이어야 하는 작업이며,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아이의 이상한 행동을 완력으로 억제하려는 욕구를 참는 건 매우 힘들지만, 강한 태풍이 오면 방비를 튼튼하게 하듯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준비하고 집중하면 반드시 온순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역’이 고정된 본체가 없듯, 아이들의 행동도 고정된 본체가 없습니다. 어른들이 고정된 몸과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만 아이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죠. 아이를 어른에 맞게 고정시키는 것은 ‘역’의 원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아무리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도 전체 궤도를 그리면서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야, 돼지야!”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던 아이에게는 혼내는 대신 “돼지”로 불린 아이의 장점 하나를 칭찬하게 했습니다. 제가 먼저 말했죠. “네가 돼지라고 부르는 친구는 이 공부방에서 자기보다 어린아이를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고 세심하게 가르쳐준단다”라고 칭찬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아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을 때 사과를 하는 것도 제가 먼저 시범을 보입니다. 아이들을 대신해서 사과하기도 하죠. “너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언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할게”, “기분이 나쁘다고 복수해서 미안해” 하고 사과를 하려면 감정도 잘 안 생기고 민망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진지한 태도와 마음이 전달되어야 하기에 매우 집중합니다. “이 아이는 잘못했을 때 사과하는 방법을 아직 몰라.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래. 선생님으로서 대신 사과할게” 하고 제가 대신 사과했을 때 아이들의 마음이 가장 많이 움직였던 것 같아요.

비밀은 ‘누가 주도하느냐’에 있었습니다. 부모가 휴가를 내고 차로 멀리 떠나서 맛난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거나, 박물관이나 관광지처럼 유익한 곳을 봤다고 합시다. 그건 ‘부모의 좋음’입니다. 아이들은 노는 시간 동안 주로 끌려다니면서 보이지 않는 욕구 불만이 잔뜩 쌓입니다. 게다가 부모가 주도한 놀이는 ‘소비’가 잔뜩 묻어 있습니다. 부모의 자기만족이 곧 아이들의 행복은 아니지만 때때로 이 둘은 부모에게 동의어로 오해받곤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어떤 것으로서,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의 목적”(『정치학』) 이라고 말했죠. 아이들이 주도하는 게 많아질수록, 아이들의 자발적인 행위들이 잔뜩 묻어날수록 아이의 행복에 가까워집니다. 이제 ‘부모의 좋음’을 너머 ‘아이의 좋음’으로 가봅시다.

기본적인 구도는 ‘아이들은 주인공, 아빠는 보조자’입니다. 이 구도만 지키면 충분히 재밌을 수 있습니다. 놀이가 잘 되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아이들의 반응입니다. 놀이가 잘 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더 어린 반응을 보입니다. 울음이나 짜증, 싸움을 동반하죠. 하지만 놀이가 잘 되었다면 성숙한 반응을 보입니다. 착한 말을 한다든지, 일찍 잔다든지, 집안일을 돕습니다. 짜증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욕구불만이 없으니까요.

『춘추좌전』은 춘추시대 노나라를 둘러싼 나라들의 정치 이야기입니다. 춘추시대를 담은 책은 『좌전』을 비롯해 『논어』, 『안자춘추』, 『국어』 등이 있고, 전국시대를 담은 책은 『맹자』, 『전국책』, 『손자병법』, 『한비자』 등이 있습니다. 전국시대는 통일을 위한 극도의 효율성과 조직학 등이 발달했습니다. 급변하는 지금 시대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전국시대가 담긴 책들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로 춘추시대의 책에 더 애정을 느낍니다. 전국시대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인간학’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엄마, 밥 다 먹었어”라고 말하면 옆에서 “엄마, 밥 다 먹었어요” 하고 말하며 따라하게 해야 합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어색하게 따라했습니다. 이

『논어』에는 자공이 ‘착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 장면이 나오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공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착한 사람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라고 말하죠.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인정받기 위해서 억지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상성喪性’이라고 합니다. 본래 타고난 자신의 성품을 잃었다는 뜻이죠.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내성적인 제 성격을 고치려고 일부러 쾌활한 척하고 다닌 그때가 저의 상성의 시기였죠.

아이들은 한 명 한 명이 특별합니다.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른들의 기준이나 아이의 성적 같은 좁은 틀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소중한 아이들의 재능과 자질이 묻혀버립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남들만큼만 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학교 성적도 남들만큼만 했으면 좋겠고, 한글 떼기와 구구단도 남들 정도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 아이의 ‘특별함’을 사라지게 하는 주문입니다.

엄마가 열 달을 아파서 존재를 낳듯, 세상의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은 저마다 아픔의 과정을 거치면서 태어납니다. 아픔이 많은 아이들은 낳을 게 많아요.

배움의 즐거움을 쌓을 수만 있다면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교육은 체계입니다. 배워야 할 수많은 시간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거죠. 정말 필요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만 채우는 것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람의 인생을 인류에 비유한다면 어린 시절은 문명 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훔치고, 때리고, 저항하는 건 자연스럽고 건강한 행동입니다. 도덕과 규칙은 어느 정도 관념이 형성된 후에 강조해도 늦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의 엉뚱하고 기막힌 질문을 ‘퀴즈’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쉽게 답을 내죠. 아이의 질문을 그런 식으로 풀었다가는 대화의 문이 닫혀버릴 거예요. 부모가 아이의 질문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까닭은 아이가 미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장미의 질문을 파악하지 못해 어린 왕자가 사랑을 잃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